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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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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날실)와 위사(씨실)가 서로 아래위로 교차하여 짜여져 어떤 넓이의 평면체가 된 천. 직포(織布) 라고도 한다. 직기로 짜여지며, 경사와 위사의 교차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직물조직이되며, 천의 조직 구성상 편물이나 조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직물은 그 용도 재단방법에 따라 '폭'이 결정되고, 또 그 가공 취급 유통상 '필'이라는 단위길이가 주어진다. 직물은 신생아의 배냇저고리로부터 시신의 수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의생활을 꾸며주는 재료이다. 이렇게 옷감으로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직물의 개발 및 용도개발에 따라 실내장식용 의료용 운송용 산업자재용 등 그 용도가 소비재로부터 생산재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옷감으로서의 직물은 보온· 흡습· 유연· 탄력 등 착용상 기능성을 지녀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패션의료로서 의 심미성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현대적인 개념이다. 또한, 옷감으로서의 직물에 대 한 여러 가지 염직기술과 가공기술이 다양하게 발달되어 그 부가가치를 한층 높이고 있다. 직물의 명칭은 산지명 창시자명 생산회사명 가공방법 등을 붙여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다.
[분류]
직물의 통상적인 분류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섬유의 종류에 따라 면직물 마직물 모직물 견직물 그리고 혼방직물 교직물 등,
2. 용도에 따라 옷감(복지) 안감(이지) 이불감 기저귀감 그리고 벽걸이용포
    깔개용포 포장용포 보강용포 여과포범포 등,
3. 의장과 조직에 따라 무지직물 줄무늬직물 날염직물 문직물 자수직물 타월직물
    벨루어직물 익직물 등,
4. 염색단계에 따라 선염직물 후염직물 등이 있다.
[역사] 인류가 일정한 장소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면서 부족국가를 이룬 신석기시대부터 간단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하였다. 처음의 옷감으로는 조물· 편물이었으며 직물은 이보다 늦게 발생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직물의 기원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고고학 적인 자료에 의하여 짐작할 따름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 된 유적으로는 고대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서 발견된 아마포(BC약 300O년), 고대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견된 면포(BC약 3OOO년), 그리고 이보다 늦은 것으로서 고대 중국의 황하강[黃河] 유역에서 발굴된 견직물 등이 있다. 이 밖에 스위스의 듀엘러 호반에서 마직물(BC약 500O년), 잉카 마야 인디언의 고대문화 유적에서 마직물과 모직물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선사시대에 문명의 발상지에서 마다 고유한 토산섬유의 종류에 따라 제각기 다른 직물이 발생했다. 이것이 오랜 기간에 걸쳐 부족 이동 국가간의 침략 교역 공물, 종교의 전파에 따라 이역에서 또 이역으로 차차 전파되었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도 처음에는 왕실의 보호업, 서민의 자급 또는 왕실에의 납품 을 위한 가내수공업 지역민간의 교역품이라는 형태로 전승해 왔다. 중앙아시아에서 발생했던 모직물은 이탈리아를 거쳐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지방에서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모직물 공업이 발전했다. 중국의 황금 같은 견직물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되어 프랑스 리옹지방이 다시 서구 견직물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도 면직물의 인도 항로와 수에즈 운하를 통한 대량 수입에만 의존했던 서구에서 뒤늦게 영국 맨체스터 지방이 면직물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영국의 산업혁명시 역직기(力織機)의 발명으로 인해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비로소 종래 수공업적이었던 직물생산이 기계적 공업생산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오늘날 공업자본주의적 직물공업의 기초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즉, 중앙아시아를 지점(支點)으로 동방에서 싹텄던 각종 직물의 수공업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서방에서 근대공업으로 발전한 것이다. 2O세기에 들어서는 각종 개량직기의 발명과 함께 레이온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등 인조섬유가 속출함으로써 종래 기계적인 제약이나 원사공급면의 제약이 풀리게 되어, 오늘날 서유럽· 미국· 일본 등 세계 도처에서는 시설근대화를 통한 대량 생산체제를 굳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조섬유직물의 본격적인 출현으로 직물의 종류와 용도는 다양해졌으며, 자연섬유직물은 인조섬유직물에 의하여 여러 가지 용도 분야에서 침식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적 점유비가 그렇다는 애기일 뿐 그 절대량의 증가는 여전하다. 설상가상으로 이들 직물은 편물과의 경쟁이 치열해져서 이를 계기로 최근에는 촉감이나 드레이프성을 개선시키는 원사가공 표면가공(Sur face Interest finishing)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한국에서는 약 5,000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칡이나 마의 섬유로 천을 짜서 웃을 지어 입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청동기시대인 부여 때는 갈의(葛衣)나 마의(麻衣)룰 입었었던 것이 확실하다. 물론 염료개발이 늦었기 때문에 흰 천[白原織] 그대로 옷을 지었고 또 흰옷을 유난히 즐겼던 탓으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 고고학적으로 가장 오래달 직물의 유적으로는 낙랑지방의 묘분에서 발굴된 견직물 조각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누에치기와 길쌈하기가 성행했으며, 2~3세기에는 백제이민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능·금의 견직기술을 처음 가르쳐 전파시키기도 했다. 통일신라의 중흥기 이후로 직물문화는 중국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아 활짝 피었다. 이 때 능 금 나 등의 견직물, 계(?)라는 모직물, 삼베·모시 등의 생산을 각각 관장하는 관서가 있었다. 염색을 관장하는 관서도 따로 있어 침염은 물론 교염 판체염. 방염호 등 날염법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또 견직물에 염색모사를 수놓아 융단을 만들거나 금박 은박을 박는 등 직물의 문양은 화려했다. 이상의 염직미술은 통일신라의 번영을 말하고도 남는다. 고려시대에는 견직물로 대표되는 통일신라의 염직미술이 쇠퇴하고 대신 마직물이 융성 했다. 이 때 삼베는, 서민이 모시는 왕실이나 권문세가에서 입거나 중국 명나라에 보내고 대 신 견직물을 들여왔다. 뒤늦게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무명베의 제직기술은 조선 전기에 발달하 기 시작하였으며 이 무명베는 종래 오랫동안 주의료(主衣料)였던 삼베·모시와 함께 주의료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일본에 전파되는 등 한국 근세의 의생활을 크게 향상시켰다.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무명베 및 삼베·모시는 농가의 가내수공업적인 부업이었고, 베틀은 원시적인 수직기 또는 편족답기(片足踏機)여서 청·일본의 양족답기에 비해 생산능률이나 베의 품질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일본은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의 서구문명을, 청은 영국· 프랑스 등과의 빈번한 통상으로 일찍부터 직물공업의 근대화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통상을 요청하는 열강의 함선을 격퇴하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직물공업의 근대화를 위한 공업자본이 형성될 수 없었다. 드디어 개화기에 들어 1885년 식산흥업정책의 일환으로 조정에 직조국이 생겨서 직할공장을 운영해 보았으나 여의치 못했다. 9O년대 후반부터 민간자본에 의한 소규모공장이 경향각지에서 탄생하기 시작했다. 대한직조소(1879)· 종로직조사(1899)· 김덕창 염직소(1902) 대한부인회 용산양잠소(1902)· 송고실업장(1904)· 경성뉴직주식회사(1910) 등 1910년까지 약 4O개소의 직조소가 명멸했다고 한다. 이 중 경성뉴직은 한국 직물업자들끼리 모여 처음으로 세운 주식회사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 직조소는 비록 영세공장이기는 하나 종래 농가의 가내수공업적 생산방식에서 탈바꿈을 하고 서양의 동력화된 역직기를 한 두 대라도 도입 설치한 근대화의 기수였다 . 이 시기가 바로 한국 직물공업의 여명기였던 것이다. 국권피탈 이후 17년 조선방직주식회사 (면직물)와 23년 조선직물주식회사(견직물·인견직물)를 비롯하여 일본인 자본에 의한 직물공 장이 설립되었고, 1919년 처음으로 민족자본인 경성방직주식회사(면직물)가 설립됨으로써 직 물공업의 본격적인 공업화가 구축되었다. 33년 이후, 비교적 쉬운 방모직물부터 공업화되었고 소모직물과 마직물은 늦게야 공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종 인조섬유직물의 발전은 눈부셨고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생산된 것은 5O년대 초반부터였는데, 이 새로운 실용직물에 대한 생산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왔다
[직물문화] 태고에 직물이 생겼을 때는 치부를 가리고 추위·더위를 막는 단순한 공작물에 불과했으며, 이것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그 옷 자체가 인체에 대한 장식의 전부였을 것이다. 차차 직물의 생산이 많아지고 여유가 생기자 인지(人知)가 발동했다. 직물에 2차· 3차적 공작 을 해서 세부적인 장식미를 추구하게 되었고, 이 미적 욕구룰 만족하기 위하여 직물의 문화세 계가 전개된 것이다. 복식문화란 것도 이 직물문화와 같은 차원의 세계에서 발생하고 발달했 을 것이다. 이 문화세계에 뛰어든 것이 염직미술(梁織美術)이다. 애당초 직물문화란 것은 왕 실의 권위, 종교의식의 장엄, 원정군의 위용, 귀족층의 사치, 관혼상제의 엄숙, 계층간 분별 의식 성별 연령별 분별의식, 이역민간의 분별의식 등 지배층 필요에 의해 소수인에게만 독점되었고 대다수 피지배층에게는 무관한 것이었다 일반 서민에게는 호화로운 직물이 비쌀 뿐 아니라 엄격한 복식제도 아래 금기의 대상이어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조선 후기만 하더라도 서민 중 내시· 상궁· 무수리· 관기 등 일부 조정의 애호를 받던 부류에게만 호화로 운 염직품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 장인(匠人)의 손에 의하여 직물에 대한 염료의 부가공작(선염 후염 날염 등), 제직면의 부가공작(사용원사 직물조직의 변화 또는 문직), 가공면의 부가공작(자수 철직 금은박 전모 등)을 통한 염직미술이 직물문화를 창조했다.
문화사상 시대를 풍미한 염직품은 기록에 많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굵은 마직 바탕에 염색한 모사를 꿰어 엮은 일종의 철직물로 호화로운 벽걸이와 깔개를 짰다고 생각되는데, 이것이 중해문화권으로 확산되어 그리스·로마의 원시 기독교 시대에는 기독교적 신화무늬인 콥트직 을 짜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페르시아의 기하학적 무늬에 영향을 받아 4~5세기에 번창한 이 래 독특한 직물문화를 이루었다 페르시아융단은 종래의 2차원 면체였던 직물을 3차원으로 발 전시킨것으로, 수모사나 양모사를 입모(立毛) 전모(剪毛)함으로써 두툼하고 푹신한 융단은 사막의 천막 생활에서 침구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직물문화는 동방 과 서방을 잇는 광범위한 염직미술을 내포했다. 이 지대는 양모 생산지일 뿐 아니라 사막여행 을 하기 때문에 기하학적 지식이 발달하여 직물조직이나 무늬에 대한 고안력(考案力)이 이미 축적되었던 터에, 동방과는 인도 면직물· 중국 견직물의 유일한 육로교역지로서 구실을 했기 때문에 각종 직물에 대한 지식과 미적 감각이 풍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로 사라센제국 의 최성기였던 하룬알라시드 궁전에서 무려 2만 매의 융단이 발굴되었는데, 그 무늬는 인도코 끼리· 그리스신상· 페르시아문자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채롭다고 한다. 중국 삼국시대 제갈공 량의 유업인 촉강금은 한대부터 내려온 두둑직무늬의 미려한 견직물을 계승발전한 것으로, 이것이 나중에 당왕조에 부귀영화를 안겨다 준 보배와 같은 교역품이 될 줄을 그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는 어수선한 전국시대에 북방 민족과 서역에서 탐내는 금직을 보호하고 또 군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직수(織手:직공)를 촉나라의 성도(成都:지금의 쓰환성[四川省])에 데려다가 은밀하게 짜게 하였는데, 이것이 시초가 되어 후세에 촉강금은 성당문화(盛唐文化)를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게 한 지고(至高)의 염직품으로 시대룰 초월해 오랫동안 전승되어 왔다. 유럽문화가 이슬람문화를 흡수한 르네상스기에는 일 거에 이집트·그리스의 롭트직, 페르시아의 융단, 중국의 촉강금 및 인도의 면직 등에 영향을 받아 염직미술이 융성했다. 로마교황이나 각 나라 왕조의 궁전 장식으로 벽걸이·깔개·휘장은 소재의 다양함은 물론, 정묘(精妙)하고 호화로운 회화적 무늬의 극치를 이루었다. 특히, 바티칸궁과 베르사유궁의 벽걸이는 유명하며, 이로부터 근대 건축의 벽면장식에 벽걸이를 사용하도록 양식화되었다. 견의 문직물은 프랑스 루이왕조의 보호 아래 자카드기계가 발명되자 리옹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다. 이것이 세계 복식 유행의 원천이 되어 약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건축의 장식용 직물에 대하여는 중세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탈리아의 활약이 눈부시다. 고래의 수예적인 염직미술은 인간의 심성생활에서 일어나는 미적 감각을 직접 표출하는 것이기에, 오늘날처럼 아무리 직물이 기계화되어 혼하고 문명 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 필요와 매력은 자주 새롭게 더해 갈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손끝 재주로 짜는 토산 수직물이 지금도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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